
나는 대답을 고르느라 눈을 굴렸다. 봉미선 팀장님은 기다려 주는 사람이 아니다.
"은정아."
세트 옆 간이 책상에서 스크립터 나은정 씨가 노트북을 들고 왔다. 말이 없고 안경이 두껍고, 8개월 동안 내 소매 단추가 몇 번째까지 잠겼는지 전부 기록해 온 사람이다.
"어제 십육 시 십 분 사진이요."
화면에 디캔터가 나란히 두 장 떴다. 호박색 수위에 빨간 줄이 그어져 있었다.
"쉬는 시간마다 줄어들던 수위가 어제부터 안 줄었어요. 한 잔이 빠져야 하는데."
"들었지?"
팀장님이 텀블러를 카운터에 탁 내려놓았다.
"8개월이야. 내가 8개월 동안 저 디캔터를 매일 아침 저울에 달았어. 근데 세트에서 음식물 금지인 거 모르니? 저거 쏟아서 니스 일어나면 이 카운터 누가 물어내. 니가?"
"제가 마셨습니다."
입에서 그냥 나왔다. 틀린 말이 잘 나오는 날이었다.
"니가 마셨어?"
"목이 말라서요."
"이 잔으로? 얼음 넣고? 코스터 위에서?"
세트 철문 쪽에서 구두 소리가 났다. 차우경이 분장 턱받이를 목에 건 채로 들어오더니, 이 광경을 잠깐 내려다보고는 네 번째 자리까지 걸어와 섰다. 앉지는 않았다.
"제가 시켰습니다."
"시킨 적 없으신데요."
내가 말했다. 그가 나를 봤다. 내가 왜 그걸 부인하고 있는지는 나도 몰랐다.
"늘 먹던 걸로 달라고 했습니다. 그럼 시킨 거 아닌가요."
"그건 위스키 달라는 말씀이셨잖아요."
"아니요. 맛없잖아요."
팀장님 눈썹이 한쪽만 천천히 올라갔다. 나은정 씨는 조용히 뭔가를 받아 적었다. 제발 안 적었으면 했다.
"맛없어?"
세트가 조용해졌다. 미술팀 막내가 벽지를 만지다 손을 멈췄다. 차우경은 그제야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안 모양이었다. 귀가 또 그 색이 되기 시작했다.
"그게, 저, 카메라에는 정말 좋습니다."
"내가 스물다섯 해를 콜라 물을 탔어. 대통령 역 배우도 그거 마셨어. 맛있어서 마셨겠니?"
"아닙니다."
"연기지! 그게 연기야! 니들은 대체 8개월을 저기서 뭘 한 거니?"
그 질문에는 둘 다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잔을 내려다보고 그는 코스터를 내려다봤다.
팀장님은 한숨을 쉬더니 턱짓으로 막내를 불렀다. 막내가 창고에서 잔 하나와 낡은 공책 하나를 가져왔다. 잔은 우리가 쓰는 것과 같은 건데 굽 한쪽에 금이 살짝 가 있었다. 공책은 표지에 소품 출납이라고 적힌, 군데군데 커피 자국이 있는 그런 것이었다.
"이건 화면에 못 나가는 잔이야. 지금부터 쉬는 시간엔 이것만 써. 디캔터 건드리지 말고, 카운터엔 코스터 안 깔고는 물 한 방울 못 올려. 촬영 들어가기 전에 다 치우고."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럼 혼나는 건."
"혼났잖아, 방금."
"아."
"그리고 소품은 나가면 적는 거야. 공짜가 어딨어. 한 잔 나갈 때마다 여기 한 줄씩 적어. 누가, 언제, 뭘. 끝나고 나 줘."
팀장님은 공책을 내 앞에 놓았다. 그러고는 돌아서서 걸어가다가, 등을 돌린 채로 말했다.
"보리차 말고 옥수수차면 색이 더 잘 나와. 다음부턴 그렇게 해."
옥수수차는 끝내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이 소품팀장의 허가라는 건 나도 안다.

"제가 적을게요."
그날 첫 쉬는 시간. 금 간 잔에 첫 잔을 따르자 그가 볼펜을 달라고 했다. 내가 조끼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 주자 그는 공책을 돌려 놓고 첫 줄에 또박또박 썼다. 글씨가 생각보다 동글동글했다.
차우경. 14시 20분. 늘 먹던 것.
그 옆에 칸이 하나 더 있었다. 원래는 반납 확인 칸이다. 그가 볼펜 끝으로 거길 톡톡 쳤다.
"여긴 뭘 적어요?"
"반납이요. 잔 돌려주셨다고."
"돈 내는 칸은 없네요."
"세트 바예요. 돈을 왜 내요."
"아까 공짜가 어딨냐고 하셨잖아요, 팀장님이."
그는 잠깐 생각하더니 그 칸에 두 글자를 썼다.
외상.
"언제 갚으시게요."
"나중에요."
"나중이 언젠데요."
그는 대답 대신 보리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게 그렇게 맛있을 일인가 싶게, 눈을 내리깔고 천천히. 그 표정을 보고 있으니 내가 끓인 게 좀 자랑스러워졌다. 티백 하나 넣고 끓인 물인데.
"너무 연하게 끓이셨어요."
"네?"
"티백 하나죠. 이 양이면 두 개 넣어야 해요. 그리고 끓는 물에 넣지 말고 찬물부터 같이 올리고요."
"그걸 8개월 동안 안 마시던 분이 말씀하시네요."
"8개월 동안 위스키를 안 마신 거지 보리차를 안 마신 건 아니죠."
그 말끝에 그가 슬쩍 웃었다. 어제처럼 소리 내어는 아니고, 눈꼬리만. 나는 그걸 보다가 잔을 닦기 시작했다. 깨끗한 잔이었다. 손을 뭐라도 시켜야 했다.
그날부터 장부에는 줄이 늘었다. 15시 5분, 늘 먹던 것, 외상. 16시 40분, 늘 먹던 것, 외상. 다음 날은 진하게, 라고 적혀 있었다. 그다음 날은 어제보다 나음. 그다음 날은 끓는점 잡으셨네요. 나는 반납 칸에 아무 말도 안 적는 걸로 대꾸했다.
곽 실장님은 내 인생 처음으로 일정보다 일찍 일어난 배우를 보고 병원을 알아봤다.
"너 요즘 뭐 먹어. 뭐 하는 건데 아침에 일어나."
"보리차 끓여요."
"보리차를 왜 네가 끓여."
"그냥요."
"그냥이라는 놈이 마트 가서 국산 볶은 보리를 찾아?"
실장님은 영수증을 흔들었다. 곽도윤, 서른여덟. 내 일정, 내 밥, 내 수면, 내 영수증을 관리하는 사람이다. 회사 카드에 찍힌 보리 천이백 원을 놓치지 않는 사람이다.
"너 대본은 봤냐? 12부 나왔어."
"제 대사 있어요?"
"'뭐 드릴까요' 있어. 앉아서 연습해."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장부가 세 장째로 넘어간 날 저녁이었다. 그날은 민태오 선배가 혼자 하는 긴 신을 찍었다. 서른넷, 이 드라마의 얼굴이고, 제작발표회에서 나를 "우리 막내 바텐더"라고 소개했다가 이름을 물어본 사람이다. 나쁜 뜻은 없다. 원래 그렇게 환하게 무례한 사람이다.
쉬는 시간이 되자 차우경은 대기실로 전화를 받으러 갔고, 나는 금 간 잔을 닦고 있었다. 그때 세트 조명 바깥에서 그 사람이 대본으로 부채질을 하며 걸어왔다. 첫 번째 자리에 털썩 앉더니 코를 킁킁거렸다.
"여기 고소한 냄새 나는데? 야, 보리차 판다며."
"어, 그게."
"은정이가 다 적어 놨더라. 나도 한 잔."
"장부에 적으셔야 하는데요."
"적어 줘. 민태오, 외상."
그는 내가 따라 준 걸 단숨에 마시고 크으, 하고 위스키 마신 사람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빈 잔을 들여다보며 네 번째 자리 쪽으로 턱을 까딱했다.
"쟤 왜 맨날 저 자리에 앉는지 알아?"
나는 잔을 든 채로 멈췄다.
"구석이라서요?"
민태오 선배가 나를 빤히 봤다. 그러더니 웃음이 터졌다. 환하고 무례한 웃음이었다.
"야. 8개월을 봤다며. 너 쟤를 봤지, 저 자리는 안 봤구나?"
"무슨 말씀이세요?"
"나중에 아무도 없을 때 저기 한번 앉아 봐."
그는 대본을 말아 쥐고 일어났다. 카운터를 두 번 탁탁 치고, 등을 돌렸다.
"잘 마셨다, 막내."
나는 네 번째 자리를 봤다. 8개월 동안 늘 사람이 앉아 있던 그 의자를, 그날 처음 의자로 봤다. 비어 있으니 작았다. 그리고 그때까지 나는, 내가 서 있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가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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