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컵에 적힌 이름

2화
컵에 적힌 이름 2화 사진 1

1위 발표 5분 전, 라이벌이 보낸 컵을 안고 앉아 있었다.
"답은 1위 발표 끝나고 들을게요."

컵은 진작 식었다. 그런데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으니 대기실 소파 위에서 나만 다른 시간을 사는 것 같았다. 지한 형은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세 번째 고쳐 맸고, 공 실장님은 복도를 오가며 무전기에 대고 뭐라고 했다. 벽에 걸린 모니터에서는 앞 팀 무대가 소리 없이 지나갔다.

남의 대기실 컵에 고백을 적어 보내 놓고, 답 받을 시간까지 정해 주는 사람이 어디 있나. 그것도 자기랑 1위를 두고 맞붙는 사람한테. 내가 이기면 뭐라고 할 생각이지. 내가 지면 또 뭐라고 할 생각이고.

무대 의상 깃이 목을 조였다. 나는 단추를 하나 풀었다가 공 실장님과 눈이 마주쳐서 도로 잠갔다.

한재이. 처음으로 맞게 적힌 내 이름.

나는 엄지로 그 세 글자를 가렸다가 치웠다가 했다. 석 달 내내 틀리던 사람이 쓴 글씨치고는 재자가 너무 반듯했다. 진작부터 쓸 줄 알았다는 뜻이다.

옆자리가 푹 꺼졌다. 건우였다. 멤버가 물었다.

"야, 왜 커피를 안 마시고 안고 있어?"

답을 모르니까.
아니, 답은 아는데 어떻게 할지 모르니까.

"식혀 먹으려고."

"그거 아이스인데."

건우가 내 컵으로 손을 뻗었다. 나는 몸을 돌려 컵을 반대쪽 팔로 옮겼다. 건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 요즘 컵 모으지?"

"뭔 소리야."

"네 가방 옆 주머니가 카페 분리수거함이던데."

그때 문이 열리고 스태프가 고개를 내밀었다.

"하프스텝 엔딩 스탠바이요!"

나는 컵을 어디에 둘까 잠깐 고민하다가, 거울 앞 내 자리 구석에 이름이 안 보이게 돌려 세워 놓았다. 지한 형이 내 어깨를 툭 쳤다.

"긴장하지 마. 이기든 지든 웃고."

그래서 웃으면서 나갔다. 무엇 때문에 긴장한 건지 형은 끝까지 몰랐겠지만.

컵에 적힌 이름 2화 사진 3

1위는 서도윤네 그룹이었다.

점수가 뜨는 순간 무대가 반으로 갈렸다. 잔향 쪽에서는 탁민성이 두 팔을 번쩍 들었고, 우리 쪽에서는 건우가 입 모양으로 욕을 했다가 카메라를 보고 박수를 쳤다. 나도 쳤다. 손바닥이 얼얼한 줄도 모르고.

꽃가루가 쏟아지는 무대에서 그는 마이크를 들었다.
말수 적은 사람답게 소감은 짧았다.

"스태프분들, 팬 여러분 고맙습니다."

객석이 웃었다. 저게 다냐고, 잔향 팬들이 익숙하게 웃는 소리였다. 진행자가 한마디만 더 해 달라고 마이크를 들이밀려던 참이었다.

그러고는 다른 그룹들이 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십 명 사이에서 정확히 나를 봤다.

꽃가루 하나가 그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걸 털지도 않았다.

"한재이 씨. 축하 고맙습니다."

옆에서 건우가 고개를 천천히 내 쪽으로 돌렸다. 지한 형도 돌렸다. 카메라도 돌아오는 것 같아서 나는 일단 고개를 숙였다. 숙이면서도 머리가 빙빙 돌았다.

축하한 적 없다.
석 달 만에 처음, 이름을 틀리지 않았을 뿐이다.

"네가 언제 축하를 했냐?"

복도로 내려오자마자 건우가 물었다. 대답할 말이 없어서 나는 물을 마셨다.

"재이야, 잔향이랑 무슨 일 있어?"

지한 형까지 끼어들었다. 형의 휴대폰에서는 벌써 알림이 쉴 새 없이 울렸다. 공 실장님이 그 화면을 넘겨 보다가 내 앞에 내밀었다. 방금 그 장면이 잘린 영상이 조회 수를 먹어 치우고 있었다.

"팬들이 묻는다. 라이벌끼리 언제 친해졌냐고. 친해?"

"아니요."

"그럼 왜 네 이름을 불러?"

"제가 묻고 싶어요."

그건 진심이었다. 공 실장님은 한숨을 쉬더니 차 시간을 공지했다. 삼십 분 뒤 출발, 비가 오니까 우산 챙길 사람은 챙기고. 대기실로 돌아가 보니 컵은 내가 둔 그대로 벽을 보고 서 있었다. 나는 그걸 집어 들고, 가방을 열고, 접이식 우산이 거기 얌전히 들어 있는 걸 내려다봤다.

한 번 고민했다.

그러고는 우산을 꺼내 건우 가방에 쑤셔 넣었다.

"실장님, 저 무대 모니터 영상 한 번만 보고 갈게요. 스태프 차 얻어 탈게요."

"너 동선 틀린 거 그제 얘기잖아. 지금 그걸 본다고?"

"네. 지금 봐야 돼요."

실장님이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건우는 문가에서 뭔가 말하려다 지한 형에게 끌려 나갔다. 끌려가면서 끝까지 내 쪽을 보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수상해.

컵에 적힌 이름 2화 사진 5

늦은 밤, 방송국 뒷문.
팬들도 차도 다 빠진 뒤였다.
비가 오는데 나는 우산이 없었다.
일부러 안 가져왔다는 건 아무도 모른다.

처마는 생각보다 좁았다. 등을 벽에 붙이고 서 있어도 빗방울이 튀어서 재킷 소매가 조금씩 어두워졌다. 벽등 하나가 젖은 바닥에 길게 번져 있었다. 대사를 연습해 봤다. 네. 아니, 너무 빠르다. 저기요, 그 컵 말인데요. 아니, 왜 이렇게 공손해. 생각 좀 해 봤는데요. 석 달을 당해 놓고 그런 말이 나오나.

사십 분쯤 지났을 때 안에서 경비 아저씨가 문을 빠끔 열었다.

"거기, 안 가요? 차 없어요?"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요."

"이 비에? 친구가 복도 많네."

친구가 아닌데요, 라고 말할 뻔했다. 아저씨가 문을 닫자 빗소리만 남았다. 한 시간이 다 돼 가도록 안 나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애초에 약속을 한 적도 없다. 여기 서 있으라고 한 사람도 없다. 뒷문으로 올 거라는 근거는 그가 늘 팬들을 피해 뒷문으로 나간다는 소문 하나뿐이었다.

문이 열리고 그가 나왔다.
우산은 하나였다.

그가 나를 봤다. 놀라지 않았다.

그게 제일 분했다. 무대 의상을 벗고 어두운 재킷으로 갈아입은 서도윤은 접힌 검은 우산을 든 채 두 걸음 떨어진 자리에 멈췄다. 복도에서 내가 컵을 내밀던 때와 똑같은 거리였다. 그는 비를 한번 보고, 내 빈손을 보고, 내 젖은 소매를 봤다. 그러고도 우산을 펴지 않았다.

"소감은 왜 그랬어요."

내가 먼저 말했다. 참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저 축하한 적 없는데요.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불러 놓으면 저희 멤버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지금 인터넷에도 난리고요. 제 매니저는 저한테 친하냐고 묻는데 제가 뭐라고 합니까. 친하지 않은데요. 커피만 받아 마셨는데요."

"맞게 부르고 싶어서요."

그 한마디에 내 말이 뚝 끊겼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또 입을 다물었다. 대신 우산 손잡이를 쥔 손이 한 번 고쳐 잡혔다. 벽등 불빛에 그의 귀 끝이 보였다. 조용한 눈은 그대로인데 귀가 빨갰다. 이 사람도 사십 분을 어딘가에서 나처럼 벼르다 나왔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빗물이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걸 셋까지 셌다. 나는 안무를 시작하기 전에 늘 그렇게 숫자를 센다.

"1위 발표 끝났어요."

그가 말했다.

"답 들으러 왔어요."

입만 열면 끝날 일이었다. 네, 한 글자면 됐다. 그런데 그렇게 넘겨주기에는 내 석 달이 너무 억울했다. 복도에서 혼자 떠든 날, 커피차 앞에 줄 선 아침들, 쓰러진 컵을 주우며 달아오르던 귀까지. 이 사람은 그걸 전부 컵으로 해 놓고, 답만 말로 받아 가겠다고 한다.

나는 재킷 주머니 속을 더듬었다. 오늘 아침 방송국 오는 길에 샀던 것, 왜 샀는지 스스로도 묻지 않았던 것이 손끝에 걸렸다.

한 걸음 다가가 빈손을 내밀었다.

"컵부터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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