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조 가장자리에 앉아서 새벽을 맞았다. 무릎에는 내 이름이 적힌 우산이 있었다.
내 우산은 많고, 잃어버린 우산은 더 많다. 지하철에 하나, 미용실에 하나, 지방 행사 대기실에 하나. 하나씩 더듬어 봤는데 서도윤이라는 사람과 이어지는 데가 없었다. 그 사람과 말을 섞은 건 복도에서 컵을 내민 날이 처음이니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여덟 시, 밴 뒷자리에서 건우 옆구리를 찔렀다.
"야, 나 석 달 전에 장우산 잃어버렸잖아."
"네가 우산 잃어버린 게 어디 한두 번이냐."
"검은 거. 긴 거."
건우는 목베개에 턱을 묻은 채 눈도 안 떴다.
"아, 그건 기억나지. 데뷔 날 잃어버린 거잖아."
"그걸 네가 어떻게 기억해?"
"본방 이십 분 전에 쫄딱 젖어서 들어왔잖아. 실장님이 네 머리에 수건 던지고. 우리 데뷔 첫 방송 사진에서 너만 미역이야."
앞자리에서 공 실장님이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 의상 세탁비, 나 아직 안 잊었다."
밴이 터널로 들어갔다. 창문이 까매지면서 거기 내 얼굴이 떴다. 젖은 머리, 수건, 그 전에 나는 왜 젖었더라. 그 전에 나는 어디에 갔더라.

데뷔 첫 방송 날은 아침부터 비가 왔다. 리허설을 끝내고 밴에 두고 온 인이어 케이스를 가지러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그날 나는 계단 수까지 세면서 다녔다.
차가 드나드는 경사로는 중간쯤에서 지붕이 끊겼다. 그 끊긴 자리에 웬 남자가 벽에 붙어 앉아 있었다.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무릎에 팔을 얹고. 빗물이 신발 옆으로 줄줄 흘러내리는데 비킬 생각을 안 했다. 담배 피우러 나온 스태프인 줄 알았지만 손에 든 게 없었다. 그냥 앉아서 비를 보고 있었다.
그냥 지나가려고 했다. 내 코가 석 자였으니까. 그런데 나는 긴장하면 말이 많아지는 사람이고, 그날은 태어나서 제일 긴장한 날이었다.
"저기요 거기 앉아 계시면 감기 들어요 들어가세요 아니 제가 뭐라고 하는 건 아니고요 요즘 방송국에 감기 돈대요 저 우산 있으니까 이거 쓰세요 저는 차까지만 가면 돼요 차는 반대쪽이긴 한데 아무튼 괜찮아요."
우산을 그 사람 무릎 옆에 세워 놓았다. 그 사람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후드 끝으로 턱만 조금 보였다. 한참 지나서야 한 글자가 돌아왔다.
"네."
나는 뛰었다. 얼굴은 보지 않았다. 볼 정신이 없었다. 몇 시간 뒤에 첫 무대가 있었고, 무대가 끝나자 그 일은 데뷔라는 더 큰 사건 밑에 깔려 깨끗이 지워졌다.
터널이 끝났다. 창문으로 흐린 아침이 쏟아졌다.
네.
복도에서 내가 떠들 때마다, 편의점까지 걷는 내내, 돌아오던 그 한 글자.
"너 왜 그래? 멀미해?"
건우가 그제야 눈을 떴다. 나는 창문에 이마를 댔다. 석 달 동안 나를 약 올린 사람에게 우산을 쥐여 준 게 나였다.
다음 방송 날, 나는 검은 우산을 들고 자판기 앞을 어슬렁거렸다. 맨 끝 대기실에서 제일 가까운 자판기였다. 커피는 이미 받았다. 이번 컵에는 이름이 맞게 적혀 있었고 그 아래에 한 줄이 있었다.
"우산 말랐어요?"
뻔뻔하기가 하늘을 찔렀다.
"화장실 찾으세요?"
기다리던 사람이 왔다. 탁민성은 동전을 넣으면서 벌써 웃고 있었다.
"그쪽 리더요. 데뷔 첫 방송 날 어땠어요?"
그의 얼굴로 표정이 서너 개 지나갔다. 마지막에 남은 건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그걸 왜 저한테 물어요?"
"대신 말해 주시는 분이라면서요."
"제가 그래서 이 팀에서 제일 피곤한 사람이에요." 그는 캔을 뽑아 들고 자판기에 기댔다. "망했어요. 리허설을요. 첫 소절을 세 번 연속 못 들어갔어요. 걔가요. 노래 빼면 시체인 애가. 세 번째에는 스태프석이 조용해지더라고요. 그러더니 애가 없어졌어요. 본방 십오 분 전까지 전화도 안 받고."
"그래서요?"
"돌아왔죠. 얼굴은 딴 사람이 돼서, 웬 검은 우산을 들고. 비 한 방울 안 맞았는데 그걸 손에서 안 놔요. 그날 본방 영상 보셨죠? 저희 그걸로 여기까지 온 거."
나는 우산을 슬그머니 등 뒤로 돌렸다.
"그 우산이 석 달을 우리 차에 있었어요. 제가 한번 편의점 갈 때 썼다가, 도윤이 화내는 걸 처음 봤거든요. 말로는 안 해요. 눈으로 해요. 아직도 꿈에 나와요."
캔 따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그의 눈이 내 어깨 너머로 비죽 나온 손잡이로 천천히 내려갔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네, 네. 화장실은 저쪽이에요. 저희 대기실 바로 앞."
화장실은 그쪽에 없다. 이 사람도 알고 나도 안다.

서도윤은 대기실 앞 벽에 기대 있었다. 나를 기다린 건지 원래 벽을 좋아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자세로. 나는 두 걸음 떨어진 자리에 서서 우산을 앞으로 내밀었다.
"돌려 드리러 왔어요."
"네."
손은 주머니에서 나오지 않았다.
"받으세요."
"그쪽 거잖아요."
"아는데요 저도 이제 아는데요 그쪽이 내일 돌려 달라고 했잖아요 다음 방송 날이요 그랬잖아요 그럼 제 우산을 제가 그쪽한테 돌려주는 건 대체 무슨 경우예요 석 달 갖고 있다가 줘 놓고 다시 달라는 건 어느 나라 계산이에요."
"오늘 오시라고요."
말이 뚝 끊겼다.
복도 저쪽에서 카트 바퀴가 굴러갔다. 그는 나를 보고 있었고, 그의 귀 끝은 천천히 색이 변하고 있었다. 나는 내민 팔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대로 들고 있었다.
"경사로." 내가 간신히 말했다. "그날 거기 앉아 있던 사람이죠."
"네."
"왜 말 안 했어요? 컵에 쓰면 되잖아요. 우산 고맙습니다. 일곱 글자예요. 그쪽 글씨면 한 컵에 들어가요."
"그쪽은 제 얼굴을 안 봤잖아요."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려다 그만뒀다. 물어봤자 네, 하고 말 사람이었다. 나는 우산을 내렸다. 지는 건 싫었고, 이 사람 입에서 뭘 받아 내려면 이 사람 방식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건 이제 알았다. 주머니에서 검은 펜을 꺼내 보였다.
"좋아요. 말로 안 하실 거면 규칙을 정해요. 컵으로 하루 한 줄. 제가 물으면 그쪽이 답해요. 그쪽이 물으면 제가 답하고요. 틀린 글자 금지예요. 한 글자라도 틀리면 그날 건 무효예요. 그쪽 오타 때문에 제가 사흘을 못 잤어요."
마지막 말은 빼고 할걸. 그의 입가가 움찔했다.
"네."
"그 네는 뭐에 대한 네예요?"
"전부요."
그는 벽에서 등을 떼고 대기실 문을 열었다. 문틈으로 안에 숨어 있던 탁민성의 얼굴이 황급히 사라졌다. 우산은 도로 내 손에 남았다.
그날부터 내 하루에는 한 줄이 생겼다.
컵은 탁민성이 날랐다. 내가 쓴 컵을 복도에서 건네면 그는 두 손으로 받아 들고 "제가 이 팀 서브 보컬인데요"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도 답이 적힌 컵은 꼭 자기 손으로 가져왔다.
왜 경사로에 있었어요?
"비 보러요."
거짓말 금지도 넣을걸 그랬어요.
"규칙은 한 줄이에요."
커피는 왜 맛있어요?
"원두를 제가 골라요."
좋아하는 숫자는요?
"셋이요."
왜요?
"그쪽이 셋까지 세잖아요."
그 컵을 들고 한참 서 있었다. 내가 숫자를 세는 건 멤버들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입을 움직이지도 않는다. 도대체 얼마나 쳐다봐야 그걸 안단 말인가.
문제는 틀린 글자 금지가 나한테도 걸린다는 거였다. 내 글씨는 원래 윗줄이 들리고, 맞춤법은 그보다 더 들렸다. 연습이 끝나면 숙소 식탁에서 이면지에 한 줄을 미리 써 봤다. 왠지와 웬지를 검색하는 내 뒤로 건우가 물을 마시러 지나갔다.
"한좋이 씨, 요새 공부하세요?"
"팬레터 답장."
"팬레터에 왜 맛있어요를 쓰는데."
이면지를 뒤집었다. 건우는 낄낄거리며 들어갔다. 그날 밤 가방 옆 주머니에 꽂혀 있던 컵 네 개를 꺼내 내 서랍 맨 아래 칸으로 옮겼다. 공 실장님 잔소리 때문이라고 해 두자. 새 컵은 그 옆에 차곡차곡 쌓여 갔다. 우산은 현관에 세워 두지 않고 내 방 문 뒤에 걸었다.

일주일쯤 지나자 물을 말이 바닥났다. 아니, 한 가지만 남았다. 처음부터 묻고 싶었는데 일부러 미뤄 둔 것. 나는 이면지에 그걸 네 번 고쳐 쓰고, 방송 날 아침 대기실에서 컵에 옮겼다.
우산 준 게 잘못이었어요? 왜 그 뒤로 제 이름만 틀렸어요?
두 문장이었다. 규칙 위반인 걸 알았지만 무효라고 하면 그것도 답이니까.
답은 쉽게 오지 않았다. 오전이 지나고, 카메라 리허설이 지나고, 도시락이 왔다가 공 실장님 손에 쓰레기가 되어 나갔다. 나는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맡기면서 문만 쳐다봤다. 메이크업 선생님이 고개 좀 그만 돌리라고 내 턱을 잡았다.
"재이야, 스탠바이 십 분 전." 지한 형이 넥타이를 만지며 말했다. "너 요즘 왜 문만 봐? 무슨 일 있으면 형한테 말해."
"없어요."
"없는 사람 얼굴이 아닌데. 다음 달 일정 때문에 그래? 아직 확정된 거 아니야."
무슨 일정이냐고 묻기 전에 문이 열렸다. 탁민성이 숨을 몰아쉬며 고개만 들이밀었다. 표정이 한 개뿐이었다. 그 사람 얼굴에서 처음 보는 일이었다.
"배달이요. 걔가 이걸 쓰는 데 삼십 분 걸렸어요. 저 이제 그만둘래요."
컵이 내 손에 넘어왔다. 아직 차가웠다. 커피는 한 모금도 줄지 않았다. 나는 건우 눈을 피해 거울 쪽으로 돌아앉았다. 반듯한 글씨, 꾹 눌린 받침. 아침의 커피 얼룩 옆에 한 줄이 있었다.
"제가 먼저 틀린 건 그날 이후예요."
세 번 읽었다. 이름을 틀린 건 그날 이후가 맞다. 그건 내가 안다. 그런데 먼저라니. 무엇보다 먼저인데. 틀린 게 내 이름이 아니라면, 이 사람은 그날 이후로 뭘 틀렸다는 건데.
"하프스텝 스탠바이요!"
지한 형이 내 등을 밀었다. 나는 컵을 거울 앞 구석에 돌려 세우고 복도로 나갔다. 조명 가방 사이로 맞은편에 잔향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 맨 끝의 사람이 나를 봤다. 조용한 눈으로, 언제나처럼 두 걸음쯤 먼 데서.
무슨 뜻이에요. 입 모양으로 물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왼손을 들어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하루 한 줄.
무대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서 나는 언제나처럼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이 생각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