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회차 아침, 나는 출입구 옆 테이프 위에 각 맞춰 선 소화기를 한참 내려다봤다.
"오늘은 맞네요, 배우님."
탁은서 누나가 지나가며 말했다. 나는 세트 끝을 봤다. 문하람이 계산대를 닦다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눈 밑 점이 일 밀리미터도 안 움직였다.
그날 밤 나는 또 점검판을 두고 왔다. 오 실장은 나한테 점검판에 끈을 달아 주겠다고 했다. 나는 소화기를 잡지 서가로 옮겼다.
12회차 아침. 출입구 옆.
그날 밤 옮겼다. 13회차 아침. 출입구 옆.
"저기요, 배우님."
탁은서 누나가 내 앞에 태블릿을 세웠다.
"소품 위치가요, 왔다 갔다 해요. 제가 스크립터 십일 년 하면서 소화기가 회차마다 맞았다 틀렸다 하는 건 처음 봐요. 맞는 날도 불안해요."
봉수 형은 신이 났다. 소품 창고 벽에 '홍 대리 근태 기록'을 붙여 놓고 정시 출근, 외근, 복귀를 날짜별로 적었다. 감독님만 모르는 듯했는데, 모니터를 보다가 혼잣말을 했다.
"둘이 요즘 뭐 있어? 멀리 있어도 안 멀어 보여. 좋아, 이거 좋아."

그래서 나는 새벽에 갔다.
14회차 콜타임이 일곱 시였다. 다섯 시에 세트 문을 밀었다. 작업등 아래에서 누가 잡지 서가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겨자색 스웨터 위에 패딩을 걸치고, 머리는 물기가 덜 말라 곱슬이 더 심했다. 그는 소화기를 끌어안고 일어나다 나를 봤다.
둘 다 잠깐 가만히 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그가 먼저 말했다. 소화기를 안은 채로, 날씨 얘기 하듯이.
"왜 돌려놔요."
"뭘요?"
"하람 씨 지금 안고 있잖아요, 그거."
그가 자기 팔을 내려다봤다. 처음 본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요?"
"하람 씨."
"원래 자리에 두라면서요. 도현 씨가."
"그건 그때 얘기고요."
"그럼 지금은요?"
그가 소화기를 바닥에 내려놨다. 내 쪽으로 한 걸음 왔다. 냉방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 두라고요? 말로 해요. 밤에 몰래 말고."
입을 열었다. 안 나왔다. 대사는 잘 외우는데 내 말은 왜 이렇게 안 나오는지 몰랐다.
"잡지 서가요."
"왜요?"
"그게, 소화기는 보행 거리 안에서 눈에 잘 띄어야 하고, 통로를 막지 말아야 하는데, 잡지 서가 앞이 그 조건에 어느 정도."
그가 웃음을 참느라 고개를 숙였다. 어깨가 흔들렸다.
"그럼 이렇게 해요."
그는 소화기를 다시 잡지 서가 앞 테이프 위에 놓고, 나를 올려다봤다.
"한 칸에 한 마디씩. 소방 법규 말고요. 왜 옮기는지 도현 씨 말로 하면, 그 칸은 제가 안 돌려놓을게요."

한 마디는 생각보다 비쌌다.
잡지 서가는 그날 점심시간에 끝났다. 분장실 복도, 나간 조명 아래에서 나는 벽을 보고 말했다.
"구 미터는 소리를 질러야 해서요. 목이 쉬어요."
"그건 도현 씨 목 때문이잖아요."
"네."
"한 칸 드릴게요. 싸게 드리는 거예요."
시집 코너는 사흘 걸렸다. 15회차 끝에 나는 소품 수레를 미는 척하며 그 옆을 지나다 말했다.
"하람 씨 대사할 때 표정이 여기서 잘 보여요."
그가 수레 손잡이를 잡아 세웠다. 대답은 안 했다. 그날 밤 소화기는 시집 코너에 있었고 다음 날 아침에도 있었다. 탁은서 누나가 날 혼내면서 입꼬리를 눌렀다.
소설 코너를 산 날은 쉬는 시간이었다. 계산대 앞에서 나는 내 앞에 놓인 흰 머그를 보고 있었다.
"소설 코너에서는요."
"네."
"커피 식기 전에 올 수 있어요. 거기서 여기까지."
"못 마신다면서요."
"그래도요."
그가 나를 잠깐 봤다. 그러더니 앞치마 주머니에서 뭘 꺼내 머그에 꽂았다. 빨대였다.
"이러면 분장 안 지워지잖아요."
스무 번 가까이 못 마신다고 했는데, 빨대 하나면 끝날 일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를 봤고, 그는 턱으로 머그를 가리켰다. 처음으로 한 모금 빨았다.
쓰고, 싱겁고, 탄 맛이 났다. 어떻게 쓰면서 싱거울 수가 있지.
"맛없어요."
"알아요. 제가 탔어요."
"이걸 그동안 다 탔어요? 매번?"
"네. 도현 씨가 안 마시니까 실력이 안 늘었어요."
나는 빨대를 다시 물었다. 그가 고개를 돌리는데 귀가 조금 움직였다. 웃을 때 그런다는 걸 그날 알았다.
그 주에 세트에 새 사람이 왔다.
제작사 홍보팀의 주세라 피디는 어깨에 작은 카메라를 메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메이킹 영상을 찍으러 왔다고 했다. 처음엔 배우 인터뷰만 찍더니, 사흘째 소품 창고에서 나오면서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저기, 이 근태 기록이 뭐예요?"
봉수 형은 평생 그 질문을 기다린 사람처럼 달려갔다.
"홍 대리님이요! 이분이 원래 출입구 옆 근무인데요, 6회차까지 계산대 쪽으로 파견을 나가셨다가, 본사 복귀했다가, 지금 다시 나오시거든요!"
"왜요?"
"그건 저도 몰라요. 근데 배우님이 매번 혼나요."
렌즈가 천천히 내 쪽으로 돌았다. 나는 점검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 동작 자체가 찍혔다.
"도현 배우님, 소화기 옮기신 적 있어요?"
"아니요."
"하람 배우님은요?"
계산대에서 그가 책을 내렸다.
"그래요?"
주세라 피디가 카메라 뒤에서 소리 없이 웃었다. 뭔가 좋은 걸 주운 사람의 웃음이었다. 오 실장은 내 옆으로 와서 낮게 물었다.
"너 뭐 찍혔어? 나 모르는 거 있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럼 귀는 왜 그러는데."
탁은서 누나는 찍히지 않는 자리로 비켜서며 그 피디를 오래 봤다. 화면 안의 건 다 보는 사람이 화면 밖의 사람을 보는 눈이었다. 선우 선생님은 내 곁을 지나다 사탕을 하나 쥐여 주셨다.
"모자라도 쓰고 다니게. 귀 좀 가리게."

17회차, 나는 네 번째 마디를 냈다.
촬영이 끝나고 조명이 반쯤 꺼진 뒤였다. 다들 장비를 싸는 사이, 나는 소설 코너에서 소화기를 들고 계산대 앞 두 걸음까지 왔다. 이제 눈치 볼 것도 없었다. 그는 계산대 안쪽에서 기록지처럼 생긴 종이를 보고 있었다.
"여기는요."
"네."
"여기까지 오면 쪼그려 앉았을 때 하람 씨 신발이 보여요."
"제 신발이요?"
"네. 끈이 맨날 왼쪽만 풀려 있어요. 그게 신경 쓰여요."
그가 계산대 너머로 몸을 내밀어 자기 발을 내려다봤다. 왼쪽 끈이 풀려 있었다. 그가 작게 소리 내서 웃었다. 처음이었다. 낮고 짧았는데, 나는 소화기를 안 놓친 게 다행이었다.
"한 칸 남았네요."
그가 말했다. 마지막 칸. 계산대 바로 옆. 그의 의자 아래. 거기 값은 나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아직 못 냈다.
"근데 도현 씨, 이거 봤어요?"
그가 들고 있던 종이를 돌려 보여 줬다. 다음 주 일정표였다. 강변, 강변, 시장 골목, 강변. 일주일 내내 야외 촬영이었다. 서점 세트는 닫는다고 적혀 있었다.
"소화기는 창고로 들어간대요."
그는 종이를 접어 앞치마 주머니에 넣고 턱을 괴었다. 하나도 안 놀란 얼굴로, 그런데 나를 똑바로 봤다.
"그럼 다음 주엔 뭐로 옆에 올 거예요?"
말문이 막혔다. 소화기 없는 구 주임은 그냥 강변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칸도, 테이프도, 핑계도 없었다. 뒤에서 봉수 형이 수레를 끌고 지나갔다. 나는 손에 든 빈 통을 내려다봤다. 가벼웠다. 진짜 어이없게 가벼웠다.
"제가 들고 가면 되잖아요."
그의 턱이 손에서 살짝 미끄러졌다.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저 사람이 대답을 못 하는 걸 나는 그때 처음 봤다. 왼쪽 귀가 천천히 빨개지고 있었다. 내 귀만 그런 줄 알았는데.
월요일 새벽 다섯 시 반, 강변 로케 버스 앞은 입김이 났다.
스태프들이 커피를 돌리며 장비를 실었다. 탁은서 누나는 목에 스톱워치를 걸고 패딩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출석을 불렀다. 선우 선생님은 일찌감치 맨 앞자리에 앉아 사탕을 까 드시고 계셨고, 버스 창 안쪽으로 곱슬머리가 보였다. 문하람은 뒤에서 세 번째 줄 창가에 앉아, 옆자리에 가방을 놓고 있었다. 치울 생각이 있어 보이는지 없어 보이는지 여기서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코트 옷깃을 세우고 버스 쪽으로 걸었다. 오 실장이 스케줄표를 말아 쥐고 다가왔다.
"잠은 잤어? 오늘 강바람 세다니까 대사 신경 쓰고. 분장팀이 그을음 다시..."
오 실장 말이 멈췄다. 눈이 천천히 내려갔다. 내 얼굴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오른손으로.
"도현아."
"네."
"그 빨간 거 뭐냐."
그때 소품 창고 쪽에서 봉수 형의 목소리가 새벽 강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홍 대리님 어디 가셨어요! 대리님! 창고에 안 계세요! 누가 대리님 무단으로 외근 보냈어요!"
버스 창 안에서 문하람이 고개를 돌렸다. 유리에 김이 서려 있었다. 그가 소매로 창을 한 번 닦았고, 그 동그란 자리로 눈이 나왔다.
나를 봤다. 오른손을 봤다.
그리고 가방을 치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