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품 위스키를 한 모금도 안 마시는 상대 배우

1화
소품 위스키를 한 모금도 안 마시는 상대 배우 1화 사진 1

상대 배우가 8개월째 소품 위스키를 한 모금도 안 마신다.
쉬는 시간마다 내가 지키는 세트 바에 앉으면서.

"위스키 한 잔이요."

오늘도 그 말이다. 조감독이 "십오 분이요!" 하고 외치면 조명팀은 사다리에서 내려오고 붐 기사는 팔을 털고, 사람들은 우르르 밖으로 빠져나간다. 담배 피우러, 핫팩 바꾸러, 대기실 난로 앞으로. 스튜디오 3동은 11월이면 입김이 나오는 곳이라 세트에 남아 있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차우경은 코트 자락을 정리하며 들어온다. 문에서 네 번째, 제일 구석 자리. 의자를 조금 당겨 앉고, 팔꿈치를 카운터에 올리고, 나를 본다.

나는 닦던 잔을 내려놓고 새 잔을 꺼낸다. 얼음 두 개, 디캔터에서 호박색으로 두 손가락. 코스터 위에 올려 밀어 준다. 8개월을 했으니 눈 감고도 한다.

그러면 그는 그걸 안 마신다.

쥐지도 않는다. 가만 두고 얼음 녹는 걸 본다. 콜라 탄 물은 얼음이 녹으면 금세 색이 빠져서, 십오 분이 지나면 잔에는 맹물 비슷한 것만 남는다. 그는 그 맹물을 두고 일어나 꾸벅 인사를 한다.

"잘 마셨습니다."

잘 마시긴 뭘.

이 사람, 왜 앉아 있는 걸까요?

드라마에서 나는 바텐더 역이다.

〈마감 전에 오세요〉, 16부작. 주인공은 민태오 선배고 나는 대본에 이름도 없다. 그냥 '바텐더'. 16부를 통틀어 대사가 "뭐 드릴까요"와 "마감입니다"뿐이라, 우리 곽 실장님은 나를 회사에서 제일 가성비 좋은 배우라고 부른다. 우리 회사 배우는 나까지 셋이다.

차우경은 단골손님 도현 역이다. 똑같은 신인인데 저쪽은 대사도 있고 사연도 있다. 동갑인 건 프로필에서 봤다. 스물. 둘 다 계약서에 혼자 도장 찍는 나이면서 8개월 내내 존댓말이고, 그동안 나눈 말의 대부분은 "위스키 한 잔이요"와 "네"다.

소품 위스키는 콜라 탄 물이다. 봉미선 소품팀장님의 비법으로, 콜라 하나에 물 넷. 팀장님 말로는 카메라에 이게 제일 위스키란다. 카메라는 그럴지 몰라도 사람은 아니다. 딱 한 번 마셔 봤는데, 김 빠진 콜라가 수돗물한테 사과하는 맛이 났다.

내가 쉬는 시간에도 바를 지키는 건 성실해서가 아니다.

바 안쪽 바닥에는 높이 20센티짜리 단이 깔려 있다. 바텐더가 손님보다 커 보여야 그림이 산다고 미술팀이 만들어 줬다. 나는 그 위가 좋다. 잔 닦는 사람한테는 아무도 말을 안 걸거든. 대기실은 셋이 같이 쓰는 방이고, 거기 가면 뭘 하고 있어야 할지 모르겠다. 여기엔 적어도 잔이 있다.

그렇다고 둘만 있는 건 아니었다. 소품팀 막내가 디캔터를 채우러 오고, 미술팀이 벽지 끝을 손보러 온다. 우리 사이엔 늘 누군가 지나갔고, 나는 그게 편했다.

소품 위스키를 한 모금도 안 마시는 상대 배우 1화 사진 3

어느 날, 세트에 우리 둘만 남았을 때 물었다.

민태오 선배 신이 밀려서 밤 열한 시가 넘었고, 밥차가 왔다는 소리에 막내까지 뛰어나간 참이었다. 천장 조명 몇 개가 꺼지고 바 위의 갓등만 남아 있었다. 그날은 그가 웬일로 잔에 손을 얹고 있었다. 마시는 건 아니고, 그냥 얼음이 어디까지 녹았나 재 보는 사람처럼.

내가 먼저 말을 건 건 그때가 처음이다. 배가 고파서 판단력이 흐려졌던 것 같다. 카운터에 손을 짚고, 고개를 조금 숙였다.

"입에 안 맞으세요?"

그가 잔을 보다가 작게 웃었다.

"이거 맛없잖아요."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나. 다 알고 있었다.

"그럼 왜 시키세요?"

"여기 앉으려면 주문을 해야 하잖아요."

그는 그 말만 하고 눈을 피했다. 유리잔을 쥔 손가락이 한 번 꼼지락거리는 게 보였다. 귀가 빨개진 것을 나는 못 본 척했다.

세트 바는 공짜다. 앉는 데 돈을 받는 사람도 없고, 주문을 안 한다고 쫓아낼 사람도 없다. 그걸 말해 줘야 하나 싶어 입을 열었는데, 그다음에 무슨 말이 와야 하는지 모르겠어서 도로 닫았다. 대본에 없는 일이었다. 나한테 있는 대사는 "뭐 드릴까요"와 "마감입니다"뿐인데, 둘 다 지금 하면 이상했다.

스튜디오 철문이 쿵 열렸다.

"우경 씨! 서진 씨! 제육 떨어져요!"

그가 일어나 꾸벅 인사를 했다. 귀는 아직 그 색이었다.

"잘 마셨습니다."

새벽 두 시, 곽 실장님 차 뒷자리에서 나는 그 문장을 계속 굴렸다. 여기 앉으려면. 여기 앉으려면. 그럼 앉으려고 앉았다는 얘긴데, 왜.

"너 왜 실실대."

"안 웃었는데요."

"룸미러 보이거든? 내일 콜타임 일곱 시다. 너 깨우는 데 내 수명이 얼마나 깎이는 줄 알아?"

창문에 머리를 대고 있으니 이상한 게 하나씩 떠올랐다. 대기실 복도를 지나다 보면 그의 손에는 늘 흰 보온병이 있다. 뚜껑을 돌리면 복도 끝까지 구수한 냄새가 난다. 종이컵은 안 쓰고 뚜껑에 따라 마신다. 테이크 사이에 한 모금, 엔지가 나면 두 모금, 민태오 선배한테 혼나고 나면 뚜껑째 비운다. 언젠가 분장 언니가 뭘 그렇게 마시느냐고 물었을 때 그가 대답하는 걸 들었다. 보리차요.

위스키에는 손도 안 대는 사람이 그건 그렇게 마신다.

그런 걸 내가 왜 다 알고 있지.

그 새벽에 처음 든 의문이었다. 대답은 안 나왔고, 나는 집 앞 편의점에 들러 티백을 샀다. 냄비에 물을 올리고, 끓이고, 식히고, 텀블러에 담고 나니 네 시였다. 알람을 세 개 맞췄다. 여섯 시 반에 곽 실장님이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왔을 때 나는 신발까지 신고 현관에 앉아 있었고, 실장님은 진심으로 놀라서 "누구세요" 했다.

소품 위스키를 한 모금도 안 마시는 상대 배우 1화 사진 5

다음 쉬는 시간, 그가 앉았다. 네 번째 자리, 어제와 같은 코트.

어제 일은 없었던 사람처럼 잠깐 메뉴판도 없는 벽을 보더니, 전에 없던 말을 했다.

"늘 먹던 걸로요."

그 말을 하고 저 혼자 민망한지 코끝을 긁었다. 나는 대답 없이 새 잔을 꺼냈다. 같은 잔에, 같은 얼음을 넣고, 디캔터를 지나쳐 바 밑 선반으로 손을 뻗었다. 내 텀블러를 기울였다.

그는 그게 뭔지 몰랐을 것이다. 잔 안에서는 똑같은 호박색이었으니까. 코스터 위에 올려 밀어 주자 그는 습관처럼 잔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냄새가 먼저 간 모양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잔을 입에 댔다.

한 모금. 목이 움직였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보리차였다. 그가 대기실에서 늘 마시던.

그는 말없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키 큰 사람이 천천히 일어나는 걸 나는 카운터 너머 단 위에서 봤다. 그가 잔을 다시 내밀었다. 8개월 만의 첫 리필이었다. 나는 텀블러를 다시 기울였고, 괜히 손목에 힘이 들어갔다. 얼음 위로 보리차가 가늘게 떨어졌다.

"이걸 어떻게 아세요?"

"8개월을 봤으니까요."

나는 잔만 보고 말했다. 그 말이 얼마나 이상한 말인지는 입 밖에 나간 다음에 알았다. 그래서 고개를 못 들고 있는데, 카운터 너머에서 숨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그날 처음, 그가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음소리가 생각보다 컸다. 세트 벽 너머에서 사다리 위의 조명 기사가 누가 웃었나 내려다볼 정도였다. 그는 손등으로 입을 가렸는데, 눈이 다 접혀 있어서 소용이 없었다. 8개월 동안 저런 얼굴은 본 적이 없다. 대본에도 없는 얼굴이었다.

"내일도 영업하세요?"

"세트는 매일 열려요."

"그럼 내일도 늘 먹던 걸로요."

그는 남은 걸 다 마셨다. 다시 앉지도 않고 선 채로, 뚜껑째 비우던 그 버릇 그대로. 그러고는 빈 잔을 코스터 한가운데 정확히 올려놓고 꾸벅 인사를 했다.

"잘 마셨습니다."

처음으로 그 말이 맞았다.

조감독이 "자, 들어갑니다!" 하고 외쳤을 때까지 나는 빈 잔을 들고 서 있었다. 닦을 생각도 못 하고. 그 뒤로 보리차는 우리 둘만의 비밀이 될 예정이었다.

예정은 하루를 갔다.

다음 날 아침, 곽 실장님의 수명을 또 깎으며 간신히 세트에 들어서자 바 앞에 봉미선 팀장님이 서 있었다. 스물다섯 해 동안 소품만 만진 사람이다. 한 손에는 바 밑 선반에 두고 간 내 텀블러가, 다른 손에는 어제 그 빈 잔이 들려 있었다.

팀장님이 잔에 코를 대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윤서진."

"네."

"내 위스키에서 왜 곡물 냄새가 나니?"

2화 이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