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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때마다 소화기를 옮기는 상대 배우

1화
촬영 때마다 소화기를 옮기는 상대 배우 1화 사진 1

상대 배우가 촬영 때마다 세트의 소화기를 한 칸씩 옮긴다.

소방관 역인 나만 스크립터한테 혼난다.

그날은 3회차였다. 나는 서점 세트의 시집 코너 서가 사이에 쪼그려 앉아 있었고, 왼손엔 점검판, 무릎 옆엔 빨간 소화기가 있었다. 지난 회차엔 잡지 서가 앞에 있던 소화기였다. 그 전 회차엔 출입구 옆에 있었고.

누가 옮겼는지는 안다. 증거가 없을 뿐이지.

고개를 돌려 세트 저쪽 끝 계산대를 봤다. 겨자색 스웨터에 앞치마를 두른 남자가 책을 코끝까지 올리고 서 있었다. 책 위로 눈만 나와 있다가, 나랑 마주치자 천천히 책 속으로 가라앉았다.

"하람 씨, 또 옮겼죠?"
"그래요?"

책 뒤에서 목소리만 건너왔다. 깜짝 놀랐다는 말을 하나도 안 놀란 목소리로 하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 장난일까요 신호일까요?

그때의 나는 그걸 진지하게 고민할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스크립터가 오고 있었으니까.

내 이름은 배도현. 올해 스무 살이고, 열두 부작 드라마 「이상 없음」에서 동네 소방관 구 주임을 맡았다. 낡은 서점에 점검을 핑계로 자꾸 들르는 사람이다. 서점 주인 연 사장이 문하람이고, 그도 나랑 동갑이다. 모태수 감독은 요즘 보기 드물게 대본 순서대로 찍는 사람이라 회차마다 점검 신이 하나씩 있었는데, 지문은 늘 똑같았다.

구 주임, 소화기 앞에 쪼그려 앉아 압력계를 본다. 이상 없음.

어디에도 소화기 위치는 안 적혀 있었다. 문제는 거기서 시작됐다.

크랭크인 전에 나는 소방서에서 이틀을 배웠다. 반장님이 그러셨다. 소화기는 출입구 옆이 제일 좋다고. 나가는 길에 집을 수 있어야 한다고. 나는 그 말이 너무 멋있어서 대본 리딩 날 쉬는 시간에 세트 도면을 보던 하람 씨한테 아는 척을 했다.

"이 세트면 소화기는 출입구 옆이 맞아요."
"왜요?"
"도망가면서 집으려고요."
"도망가는데 왜 집어요?"
"그러게요."

그가 그때 처음 웃었다. 웃으면 눈 밑 작은 점이 조금 올라갔다. 그래서 1회차엔 소화기가 출입구 옆에 있었다. 2회차엔 잡지 서가 앞으로 가 있었고.

"배우님, 소품 위치 또 안 맞아요."

스크립터 탁은서 누나는 목에 스톱워치를 걸고 태블릿을 내밀었다. 지난 회차 사진과 오늘 세트가 나란히 떠 있었다.

"제가 안 옮겼는데요."
"마지막으로 손댄 사람이 배우님이잖아요."

소품팀 막내 봉수 형은 옆에서 소화기를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소화기를 홍 대리라고 부르는 사람이었다.

"저희 아니에요. 저희는 홍 대리님 모시기만 해요. 출근을 어디로 하시는지는 몰라요."

촬영 때마다 소화기를 옮기는 상대 배우 1화 사진 3

쉬는 시간마다 그가 커피를 들고 왔다.

그날은 5회차였다. 계산대에 점검판을 놓고 다음 신 대사를 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앞치마 끈 스치는 소리가 나더니 내 앞에 흰 머그가 내려앉았다.

"드세요."
"못 마셔요. 분장 지워져요."

나는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코 밑이랑 턱에 그을음 분장을 받는 데 삼십 분이 걸린다. 머그를 입에 대는 순간 분장 선생님 얼굴이 먼저 떠오른다.

"네. 그럼 여기 둘게요."
"못 마신다니까요."
"네, 들었어요."

어제도 들었고 그제도 들었을 것이다. 그는 머그 손잡이를 내 쪽으로 살짝 돌려놓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김이 올라가다 말고, 식고, 촬영이 끝나면 봉수 형이 아깝다며 치웠다. 나는 분장 지워진다고 못 마신다 했고, 그는 매번 내 앞에 놓았다. 그게 우리 대화의 거의 전부였다.

머그를 보다가 그 뒤로 시선이 넘어갔다. 빨간 통이 내 팔꿈치 너머에 서 있었다.

1회엔 출입구 옆. 2회엔 잡지 서가. 3회엔 시집 코너. 4회엔 소설 코너. 오늘은 계산대 앞 두 걸음.

언제 저기까지 왔지.

그걸 나보다 먼저 알아챈 사람이 있었다.

서점 단골 노인 역을 맡은 선우갑 선생님은 일흔두 살이고, 대기 시간엔 세트 소파에 앉아 박하사탕을 까 드신다. 5회차 저녁, 내가 지나가는데 선생님이 사탕 껍질로 바닥을 가리키셨다.

"자네, 바닥 좀 보게."

바닥엔 탁은서 누나가 위치를 맞추려고 붙인 작은 테이프가 다섯 개 있었다. 회차마다 소화기가 섰던 자리였다.

"쭉 이어 보게. 뭐가 되나."
"지그재그요?"
"화살표지, 이 사람아."

선생님은 사탕을 볼 안쪽으로 옮기고 눈으로 끝을 따라가셨다. 그 끝에 계산대가 있었다. 계산대엔 문하람이 앉아 책장을 넘기고 있었고, 우리가 보자마자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조금 빨라졌다.

"장난이에요, 선생님. 저 사람 원래 그래요."
"그래. 장난이겠지."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런데 장난에 방향이 있으면 그건 장난이 아니라 출퇴근이야."

나는 웃었다. 웃었는데 귀가 뜨거웠다. 선생님은 내 귀를 흘끗 보더니 사탕을 하나 더 까셨다.

"연기는 귀부터 늘어야 하는데, 자네는 귀만 늘었구먼."

촬영 때마다 소화기를 옮기는 상대 배우 1화 사진 5

6회, 소화기는 계산대 바로 옆에 있었다.

탁은서 누나가 한숨을 쉬었고 감독님은 모니터를 보더니 그림 좋다고, 오늘은 그 자리로 가자고 했다. 조명팀이 위치를 잡는 동안 나는 동선 확인을 하러 들어갔다.

대본대로 쪼그려 앉자 그의 의자 바로 아래였다.

손을 뻗어 소화기를 잡았다. 무릎이 그의 앞치마 자락에 닿을락 말락 했다. 스웨터의 보풀까지 보이는 거리였다. 지난 다섯 회차 동안 소리를 질러 주고받던 대사를, 이제 혼잣말처럼 해도 들릴 자리였다.

고개를 들었다.

그가 대본을 읽는 척하며 나를 보고 있었다. 눈꺼풀만 내려간 척, 눈동자는 슬쩍 이쪽이었다. 주변에서 조명 스탠드 끌리는 소리가 났고 아무도 우리를 안 봤다.

"하람 씨."
"네."
"왜 자꾸 옮겨요."

그가 대본을 덮었다. 페이지가 닫히는 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여기 있으면, 찍는 동안 제 옆에 있잖아요."

소방서에서 배운 것 중에 이런 게 있다. 압력계 바늘이 초록 칸에 있으면 정상이고, 빨간 칸으로 넘어가면 바로 알려야 한다.

내 바늘이 어디 있는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다 계산대 모서리에 머리를 박았다. 쿵 소리에 조명팀 형 하나가 돌아봤다. 하람 씨가 놀라서 손을 뻗었고, 나는 그 손을 피해 한 걸음 물러나면서 내 인생에서 제일 멍청한 대사를 했다.

"원래 자리에 둬요."

그리고 도망쳤다. 쉬는 시간도 아닌데 세트 밖 주차장 자판기 앞까지 걸어갔다. 매니저 오찬규 실장이 쫓아와 스케줄표로 내 얼굴에 바람을 부쳤다.

"왜 여기 있어. 머리는 왜 부었어. 귀는 왜 그래, 분장이야?"
"그런가 봐요."

그날 촬영은 어떻게 끝났는지 잘 모르겠다. 탁은서 누나 기록지에 '배우 귀 색 튐'이라고 적혀 있었다는 얘기만 나중에 들었다.

7회차 아침, 세트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바닥부터 봤다.

소화기는 출입구 옆에 있었다. 1회차 테이프 위에 각까지 맞춰서.

"오늘은 딱 맞네요, 배우님. 잘했어요."

탁은서 누나가 처음으로 나를 칭찬했다. 세트 저쪽 끝에서 문하람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도현 씨."

정중하고, 흠잡을 데 없고, 책도 코끝까지 올리지 않았다. 쉬는 시간이 왔다. 나는 계산대에 점검판을 놓고 앉아 있었다. 분장 지워질 걱정은 없었다.

커피가 오지 않았으니까.

나는 점검표 칸에 대본대로 적었다. 이상 없음.

살면서 쓴 글씨 중에 제일 거짓말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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