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입구에서 계산대까지는 구 미터였다.
봉수 형이 줄자로 재 줬다. 왜 재 달라고 했는지는 묻지 않았고, 재고 나서 홍 대리님 통근 거리가 늘었다고 슬퍼했다.
구 미터면 대사를 크게 해야 한다. 7회차 점검 신에서 나는 출입구 옆에 쪼그려 앉아 압력계를 보고 소리쳤다.
"이상 없습니다, 사장님!"
저 끝에서 문하람이 고개를 들었다.
"수고하세요, 주임님."
흠잡을 데 없는 대사였다. 표정도 대본에 있는 그대로였다. 그런데 구 감독님이 모니터 앞에서 일어나 헤드셋을 벗었다.
"둘이 싸웠어?"
"아니요."
"아니, 어제까지는 같은 동네 사람들이었는데 오늘은 구가 달라. 왜 이렇게 멀어?"
"대본대로 출입구인데요, 감독님."
탁은서 누나가 말했다. 나는 처음으로 그 누나 편을 들 수도, 안 들 수도 없는 기분이 됐다. 그날 그 신만 열한 번을 갔다. 열한 번째에 감독님은 포기한 얼굴로 오케이를 줬고, 나는 목이 쉬었다.
쉬는 시간에 그가 커피를 들고 나왔다.
나는 괜히 점검판을 정리했다. 앞치마 끈 스치는 소리가 다가오다가, 내 옆을 지나 소파 쪽으로 갔다.
"선생님, 드세요."
"아이고, 고맙네."
선우 선생님이 머그를 받아 내 쪽을 보며 후루룩 소리를 내셨다. 그 연세에 저렇게 큰 소리로 드실 일이 뭐가 있나. 다음 쉬는 시간엔 탁은서 누나 책상에, 그 다음엔 봉수 형 소품 수레에 머그가 올라갔다. 봉수 형은 감격해서 머그 사진을 찍었다.
오 실장이 내 옆에 앉아 김밥을 까며 물었다.
"너 왜 그렇게 쳐다봐?"
"안 쳐다봤어요."
"커피 먹고 싶어? 네가 안 먹는다며. 분장 지워진다며."
"안 먹죠."
"근데 왜 그렇게 쳐다보냐고."
"안 쳐다봤다니까요."
오 실장은 김밥을 씹으며 나와 계산대를 번갈아 봤다. 그러고는 내 스케줄표에 뭔가를 적었다. 나중에 보니 '도현 컨디션 난조, 수분 부족?'이었다.
선우 선생님이 빈 머그를 흔들며 지나가셨다.
"맛은 없네. 그래도 받아 마시니까 기분은 좋구먼."
"선생님."
"왜."
"아니에요."
"그래. 아니겠지."
8회차도 소화기는 제자리였다. 나는 그 칭찬을 또 들었다.
"오늘도 맞아요, 배우님."
"누나. 앞 회차 사진 좀 볼 수 있어요?"
"왜요? 이제 궁금해요?"
탁은서 누나가 태블릿을 건넸다. 위치가 정말 맞는지 확인하려는 척이었다. 사실은 뭘 확인하려는지 나도 몰랐다. 나는 사진을 뒤로 넘겼다. 7회차, 6회차, 5회차.
소화기를 찍은 사진들이었다. 그래서 그동안 빨간 통만 봤다.
3회차 사진 구석에 계산대가 걸려 있었다. 책 위로 눈이 나와 있었다. 4회차, 책이 없었다. 턱을 괴고 있었다. 2회차, 하람 씨는 서가를 정리하는 중이었는데 고개만 이쪽이었다. 1회차, 저 멀리 작게, 출입구 쪽을 보고 있었다.
여섯 장 전부 같은 방향이었다.
"배우님."
고개를 드니 누나가 스톱워치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저 스크립터 십일 년 했어요. 화면 안에 있는 건 다 봐요."
"그럼 누가 옮겼는지도 아셨어요?"
"2회차 때부터요."
"그런데 왜 저만 혼내요?"
누나는 태블릿을 도로 가져가서 화면을 껐다.
"배우님, 혼날 때마다 어디 봤어요?"
나는 대답을 못 했다.
"계산대 봤잖아요. 저도 일하는 사람인데 재미는 있어야죠. 그리고 지금 얘기는 안 한 거예요. 소품 위치 틀리면 또 혼낼 거예요."
분장실 앞 복도엔 자판기가 하나 있고, 조명이 하나 나가 있다.
그날 저녁 거기서 그를 마주쳤다. 앞치마를 벗어 팔에 걸치고 동전을 넣는 중이었다. 나는 인사를 하려고 했다. 인사만 하려고 했다. 그런데 입에서 나온 건 이거였다.
"왜 커피 안 줘요."
그가 돌아봤다. 자판기에서 캔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못 마신다면서요."
"못 마시죠."
"근데요?"
"놓아두는 건 되잖아요."
"놓아둬서 뭐 해요. 식는데."
맞는 말이었다. 나는 복도 벽을 봤다. 소방 대피 안내도가 붙어 있었고, 나는 평소에 그런 걸 끝까지 읽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글자가 하나도 안 들어왔다.
"머리는 괜찮아요?"
그가 캔을 꺼내며 물었다.
"네?"
"계산대 모서리. 봉수 씨가 스펀지 붙여 놨어요. 다음에 또 도망가실 때 다치지 말라고."
"도망간 거 아니에요."
"그래요?"
그 말을 오랜만에 들었다. 일주일 만이었는데 오랜만이라고 느끼는 내가 어이없었다.
"원래 자리에 두라면서요."
그는 캔을 내 쪽으로 내밀지 않았다. 자기 손에 들고, 작게 웃었다. 눈 밑 점이 올라갔다가 금방 내려왔다.
"저 말 잘 듣잖아요, 도현 씨."
그러고는 걸어갔다. 나는 그 자리에 오래 서 있다가, 자판기 앞에서 아무것도 안 뽑고 돌아섰다.

9회차가 끝난 밤, 나는 점검판을 두고 왔다고 했다.
오 실장은 차에서 기다렸다. 세트는 작업등 하나만 남기고 꺼져 있었다. 책등이 전부 어둡게 서 있었고 낮에는 안 들리던 냉방기 소리가 났다. 점검판은 내 가방에 있었다. 나는 출입구 옆으로 가서 쪼그려 앉았다.
압력계 바늘은 초록 칸에 있었다. 언제나 있었다. 가까이 보니 칠해 놓은 거였다.
한 손으로 소화기를 들었다. 어이없을 만큼 쑥 올라왔다. 소방서에서 들어 본 건 묵직했는데, 이건 빈 통이었다. 소품이니까. 찍을 때마다 들었는데 그걸 이제야 생각했다. 내가 하는 점검은 연기고, 통은 비어 있고, 바늘은 페인트고, 나는 소방복을 입은 스무 살 배우였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이걸 들고 다녔다.
아무도 없을 때, 이 세트를. 촬영 전 새벽이든 끝난 밤이든. 다섯 번을, 한 칸씩. 스크립터한테 혼나는 건 나였지만 일찍 나오고 늦게 남은 건 그 사람이었다. 들어 보면 안다. 가벼운데, 혼자 드는 건 좀 쓸쓸한 무게였다.
여기 있으면, 찍는 동안 제 옆에 있잖아요.
나는 일어섰다. 잠깐 출입구를 봤다. 나가는 길에 집을 수 있는 자리. 맞는 자리. 내가 그렇게 잘난 척을 한 자리.
그리고 소화기를 들고 걸었다.
잡지 서가까지 열네 걸음이었다. 내려놓는 소리가 작았는데도 심장이 쿵 했다. 테이프 위에 각을 맞추고, 도둑처럼 나왔다. 차에 타자 오 실장이 물었다.
"점검판 찾았어?"
"네."
"근데 왜 웃어?"
"안 웃어요."
10회차 아침이었다.
"배우님. 소품 위치 또 안 맞아요."
탁은서 누나 목소리가 그렇게 반가운 줄 몰랐다. 나는 최대한 억울한 표정을 지으려고 했지만 연기가 영 안 됐다. 누나는 나를 삼 초쯤 보더니 스톱워치를 눌렀다.
봉수 형이 소품 수레를 끌고 뛰어왔다.
"홍 대리님 복직하셨어요? 어디로 출근하셨어요?"
선우 선생님은 소파에서 사탕 껍질을 까다 말고 잡지 서가와 나를 차례로 보셨다. 아무 말도 안 하셨다. 그냥 사탕을 하나 더 까셨다.
나는 점검판을 들고 잡지 서가로 갔다. 쪼그려 앉았다. 등이 뜨거웠다. 세트 끝에서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나고,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나고, 그러다 조용해졌다.
"도현 씨."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예의 바른 그 목소리 말고, 하나도 안 놀란 그 목소리.
"또 옮겼죠?"
돌아봤다. 계산대 위로 책이 코끝까지 올라와 있었다. 그 위로 눈만 나와 있었고, 눈이 웃고 있었다.
나는 점검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귀까지는 안 가려졌다.
"그래요?"
쉬는 시간에 내 앞에 흰 머그가 내려앉았다. 그는 아무 말도 안 했고 나도 못 마신다고 안 했다. 그걸로 끝인 줄 알았다. 드디어 이긴 줄 알았다.
다음 날 아침, 소화기는 출입구 옆으로 돌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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